사유하는 땜장이 — 한병철이라는 철학적 사건

 

베를린의 서울인, 서울의 베를린인.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써 어디에나 말을 건넨다.


Aeon이 발행한 에세이 「Thought-tinkering」은 한병철을 한 줄로 요약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웃는다. 그는 '번아웃 철학자'도 아니고, '디지털 비관론자'도 아니다. 에세이의 필자 조너선 코언은 그를 이렇게 읽는다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적자이자 선불교의 묵상자, 서울의 기술소년이 독일어로 사유하는 유럽 지성계의 이방인. 그 이방성이야말로 그의 사유가 뿜어내는 열기의 원천이다.

이 글은 그 에세이를 해체하면서, 한병철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지금 이토록 날카롭게 파고드는지를 묻는다.


폭발에서 태어난 철학자

한병철은 서울에서 1959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침실에서 전선과 화학약품을 가지고 놀았다. 토목기사였던 아버지를 흉내 내며 스스로 실험하다가, 결국 화학 폭발 사고를 일으켜 거의 실명할 뻔했고 지금도 그 흉터를 지니고 있다. 그 폭발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예언이었다.

그는 이후 금속공학을 전공했지만, 독서와 사유는 점점 유럽 쪽으로 기울었다. 스물두살에 독일어를 모른 채 독일로 떠났다. 부모에게는 '과학 공부를 계속하러 간다'고 했다.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했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는 이미 한병철 철학의 씨앗이 들어 있다. 폭발자유를 찾아 탈출그러나 그 자유가 또 다른 형태의 규율(독일어, 독일 철학, 독일 대학)로 이어지는 역설. 자유와 억압이 서로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는 것. 이것이 그가 평생 반복해서 탐구하게 될 주제다.

그는 Die Zei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전엔 전선과 납땜인두로 땜질했지만, 지금의 땜질은 사유의 재료로 이뤄진다고. 사유는 활동이기보다 하나의 환경이라는, 독일 지성의 소명 관념과 맞닿은 은유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21세기 서자

한병철의 지적 계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도발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통 안에 있다.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서, '계몽의 변증법' — 진보와 퇴행, 창조적 생산과 파괴적 폭발이 뒤얽히는 불안한 상호작용을 새로운 장으로 전개하는 사상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나치즘과 할리우드 문화산업을 동시에 비판했던 것처럼, 한병철은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이 지배하는 디지털 자본주의를 날카로운 눈으로 해부한다. 그러나 방법론에서 그는 선배들과 다르다. 한병철의 산문은 철학적 에세이라기보다 문학과 시의 문체에 가깝다고 평가받는다. 그 자신도 이 점을 인정하면서, 과거엔 이해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썼지만 지금은 접근 가능성이 매우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결과는 놀랍다. 100페이지 안팎의 얇은 책들이 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고,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터키어 권역에서 X(구 트위터)의 토론량이 독일어나 영어보다 많다. 서울에서 베를린으로 건너간 이방인이 라틴아메리카와 중동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철학자가 됐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 그가 진단하는 시대적 증상국경을 초월하는 번아웃과 자기착취을 입증한다.


피로사회: 감시관과 죄수가 동일인인 세계

한병철의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 개념의 핵심에는 지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다. 산업사회의 노동자는 더 열심히 일하라는 명령을 초자아적 죄책감의 형태로 내면화한다. 공장 감독관이 채찍을 들 필요가 없다. 노동자 스스로 채찍을 들고 자신을 때린다.

신자유주의는 이 논리를 완성했다. 한병철에 따르면, 결국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회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인 자신이 노예가 되는 노동 사회로 귀결된다.

이것이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타트업 창업자가 새벽 세 시에 슬랙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은 상사의 명령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자유'이자 '나 자신에 대한 투자'. 직장인이 퇴근 후에도 인스타그램에 '열심히 사는 나'를 전시하는 것은 강요가 아니다. 그저 나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 자발성이야말로 착취의 가장 정교한 형태라고 말한다.

"번아웃은 일 때문에 생기는 질병이 아니라 수행(performance)의 압박 때문에 생긴다. 인간의 영혼이 상처받는 것은 노동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원리인 이 수행 때문이다."

한병철,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

그는 이를 면역학적 언어로도 설명한다. 오늘날의 심리적 질병들우울증, ADHD, 번아웃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바이러스성 감염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경색(infarction)'이다. 너무 많은 가능성, 너무 많은 긍정, 너무 많은 자기계발이 혈관을 막아버린 것이다.


디지털 파놉티콘: 우리가 스스로 짓는 감옥

푸코는 벤담의 원형 감옥을 근대 권력의 은유로 삼았다. 중앙 감시탑에서 간수가 모든 수감자를 감시하지만, 수감자는 언제 감시받는지 알 수 없어 스스로 행동을 규제한다. 한병철은 이 모델이 디지털 시대엔 이미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디지털 파놉티콘은 간수가 누구이고 수감자가 누구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롭게 그 감시와 모니터링에 참여한다. 우리는 죄수이자 동시에 간수이고,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우리는 이것을 자유로 받아들인다.

인스타그램에 오늘의 식사를 올리고, 피트니스 앱에 오늘의 달리기 기록을 공유하고, 링크드인에 새로운 자격증을 게시하는 행위를 떠올려보라. 이것은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자기전시다. 투명성 사회의 목표는 부정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에 '싫어요' 버튼이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정성은 소통을 가로막고,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설계된 착취를 가로막는다.

당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인스타그램 피드, 링크드인 경력란은 모두 '당신'이라는 상품의 광고판이다. 이 자기전시 충동은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자유의 느낌 안에 포장된 권력의 작동이다. 한병철에게 이것이야말로 '타자의 추방'이다나와 다른 것, 불투명한 것, 저항하는 것을 모두 소비 가능한 표면으로 매끄럽게 만들어버리는 문명의 폭력.


동양의 공백이 서양의 과잉을 비춘다

한병철이 단순한 비관론자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가 가진 또 하나의 관점 때문이다. 선불교, 노자, 일본 미학이 그의 사유에 들어오는 방식.

그에게 독일 전통이 보편성의 이상을 제공한다면, 동아시아의 사유와 언어와 문화는 특수한 것에 대해 더 유희적이고 살아있는 감각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산문에 빛과 색을 스며들게 한다. 한병철 자신의 말로, 튀김 반죽은 채소나 생선 조각을 '바삭한 공허의 덩어리'로 변형시킨다. 선 석정에서 '자연은 공백과 부재 속에서 빛난다.'

서양이 두려워하는 '비어 있음'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의미의 원천이다. 하이데거가 '()'를 존재의 지평으로 사유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동아시아 사유에 접근하고 있었다. 한병철은 이 두 전통의 교차로에 서서, 서양의 '과잉의 폭력'에 맞서는 처방으로 '부정성의 복권'을 제안한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점점 더 자아의 수많은 반영들 속에서 살아간다. 완벽하게 결정화된 디지털 이미지들은 모호함과 불명확함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모호함과 불명확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아닌 것과 가장 깊이 연결될 수 있다. 부정성 안에서 우리는 타자를 발견한다.

연애앱 프로필을 생각해보라. 거기엔 상대방의 키, 직업, 취미, 사진이 정밀하게 기재되어 있다. 에로스는 알 수 없음에서, 마주침의 우연성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디지털 매칭 플랫폼은 그 우연성을 알고리즘으로 대체한다. 한병철이 보기에,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쇼핑이다. 까다로운 쇼핑의 결과가 높은 이혼율로 이어지는 것은 예견된 서사일 뿐이다.  


반복과 한계: 스스로 비판이 되는 비판

위대한 사상가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한병철에게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일관성이다.

그의 탐구들은 놀라울 만큼 일관된 사유의 프로젝트를 이룬다. 그러나 넓게 읽다 보면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이 집요하게 유지되는 일관성이 결국 그것이 비판하는 것의 증상이 되는 건 아닐까?

한병철은 '성취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이 시대의 번아웃을 설명했다. 그러나 다섯 번, 여섯 번 반복되면 그 통찰은 공식이 되고, 비평가 코언의 지적처럼 "한병철의 논쟁은 공식화되어, 그 자체가 그가 비판하는 무주의의 한 종류가 된다."

매 책이 100페이지 남짓이고, 매년 한 권씩 출간되며, 매번 같은 결론디지털 자본주의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으로 수렴한다면, 그것은 철학적 성찰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과잉 생산인가? 한병철이 비판하는 바로 그 구조멈추지 못하고 계속 생산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그 자신이 철학 생산 방식으로 재연하고 있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그럼에도 이 아이러니는 그의 사유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진단이 얼마나 현재 다양한 방식으로 깊이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반증한다. 시스템 바깥에서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한 언어 자체가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것이 바로 '계몽의 변증법'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거부하는 이유

그는 스마트폰을 소유하지 않고, 관광 여행을 하지 않으며, 음악은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듣는다. 수십 년째 '비밀 정원'을 가꾸고 있으며, 그 경험을 책으로 썼다. 라디오와 TV 인터뷰를 거부했고, 생년월일을 포함한 어떤 개인 정보도 공개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괴짜 기질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철학이 몸으로 실천하는 방식이다. 투명성을 거부하고, 자기전시를 거부하고, 디지털 판옵티콘에서 탈주하는 몸짓. 그는 '비밀 정원'을 가꿈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산다.

 

당신의 피로를 이름 붙여줄 언어

한병철은 당신에게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그는 혁명을 부르짖지도 않고 명상 앱을 추천하지도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은 더 오래되고 더 근본적인 것이다당신이 막연히 느끼던 것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

당신이 주말에도 일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sns에서 타인의 성취를 보며 공허해지고, 쉬고 있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그 느낌. 그것은 당신의 나약함이 아니라 시스템의 설계다. 당신은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설계된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정보로 충만하지만 방향을 잃고 있다. 정보는 원심력을 가지며 사회적 결속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반면 진리는 의미와 방향을 제공하며, 사회를 하나로 묶는 구심력을 지닌다.

한병철이 30여 권의 책을 통해 반복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된다. 느리게, 저항하면서, 타자와 함께.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최적화하는 세상에서, 최적화되기를 거부하는 것. 스마트폰 없이 비밀 정원을 가꾸는 철학자가 그 몸으로 증명하듯이.

서울에서 폭발을 경험한 소년이 독일어로 사유하며 세계에 말을 건네는 이 특이한 사건한병철이라는 현상은 어쩌면 그 자체로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선명한 알레고리다.


출처 Ben Cohen, "Thought-tinkering: the Korean-German philosopher Byung-Chul Han," Aeon Essays, 2025 2 28. https://aeon.co/essays/thought-tinkering-the-korean-german-philosopher-byung-chul-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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