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은 존재해야 하는가? —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찌른 '무의미한 직업'의 의미

 한 급진 잡지에 실린 짧은 에세이가 인터넷을 강타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스트라이크!》에 기고한 「불쉿 잡(Bullshit Jobs) 현상에 관하여」는 발행 직후 12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100만 명 이상이 읽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수백만 명의 직장인이 그의 글에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의심하면서 매일 출근해서 수행하는 그 일이, 사실은 없어도 세상이 멈추지 않는 것임을. 그레이버는 그 비밀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케인스의 약속과 문명의 배신

1930, 경제학의 거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담대한 예언을 남겼다. 기술의 발전이 계속된다면 20세기 말 영국과 미국의 노동자들은 주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고. 그레이버는 이 예언을 정면으로 들고 온다그것이 기술적으로는 완벽하게 실현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그 이유로 우리는 흔히 '소비주의의 팽창'을 든다. 사람들이 자유 시간 대신 더 많은 물건과 쾌락을 택했다는 것. 그레이버는 이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지난 100년 사이 폭발적으로 생겨난 직업들컨설턴트, 기업 변호사, PR 전문가, 인사 담당자, 텔레마케터, 각종 관리직을 살펴보면, 이것들이 스시나 아이폰이나 운동화를 만드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이 드러난다. 생산과 무관한 행정, 금융, 관리의 영역이 조용히, 그러나 거대하게 팽창했다.

20세기 초부터 2000년까지 미국 고용 구조를 추적한 보고서는 이것을 숫자로 보여준다. 제조업, 농업, 가사 서비스 종사자는 급감했지만, '전문직·관리직·사무직·판매직·서비스직'은 전체 고용에서 4분의 1에서 4분의 3으로 세 배 이상 늘었다. 생산하는 일은 기계로 대체되었지만, 그 빈자리는 해방이 아닌 다른 종류의 노동으로 채워졌다. 그레이버는 묻는다이런 종류의 노동은 과연 필요한가?


불쉿 직업이란 무엇인가

그레이버의 정의는 간결하고 날카롭다. 불쉿 직업이란, 그 일을 하는 당사자조차 자신의 직업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는 유급 고용이다. 단순히 힘들거나 보람이 없는 일이 아니다. 세상이 그 직업 없이도 돌아간다는 것을어쩌면 더 잘 돌아갈 것을스스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매일 출근해야 하는 것.

그는 이것을 "심각한 심리적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의 일이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비밀스럽게 느끼면서, 어떻게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를.

이 정의가 강력한 이유는 외부의 판단이 아니라 당사자의 내면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레이버는 "사회적 가치의 객관적 척도는 없다"고 인정한다. 어떤 일이 쓸모 있는지를 바깥에서 재단할 권위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이미 알고 있고 있고 매일 매일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파티에서 말을 피하는 사람들

그레이버는 이 자기 인식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한 장면으로 포착한다. 파티에서 자신을 인류학자라고 밝히는 순간, 기업 변호사나 컨설턴트들은 자신의 직업 이야기를 피하려 든다는 것. 그러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그들은 폭발한다자신의 일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쓸모없는지에 대한 격렬한 독백으로.

그레이버는 기업 변호사 중에서 자신의 일이 불쉿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단순한 직업적 불만이 아니다. 직업 불만은 "내 상사가 나쁘다"거나 "급여가 낮다"는 식이다. 이것은 더 근원적인 무너짐이다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는 감각. 그 감각을 매일 억누르며 출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레이버는 그것을 '영혼의 상처'라고 부른다.

한국의 대형 로펌이나 컨설팅 펌, 혹은 수십 개의 팀이 서로 보고서를 주고받는 대기업이나 공무원 조직을 생각해보라. 오후 내내 아무도 읽지 않을 PPT를 만들고, 형식적 검토를 위한 회의를 준비하고, 누군가의 보고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들. 그들이 퇴근길 지하철에서 느끼는 공허함그것이 그레이버가 말하는 폭력의 실체다.


시인이 변호사가 된 이야기

그레이버의 글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장면은 한 친구의 이야기다. 12살 이후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만난 그 친구는, 그 사이 시인이 되었다가 인디 록 밴드의 보컬이 되어 있었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그의 노래를 들을 만큼 그는 분명히 재능 있었다. 그러나 앨범 두 장이 실패하고 계약이 끊기자, 빚과 갓 태어난 딸 앞에서 그는 '방향 잃은 사람들의 기본 선택지'를 고른다로스쿨. 이제 그는 뉴욕의 유명 기업 로펌에서 일하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일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제기하는 질문은 묵직하다. 왜 사회는 재능 있는 시인-음악가에 대한 수요는 거의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기업 변호사에 대한 수요는 무한히 만들어내는가?

그레이버의 답은 간단하다인구의 1%가 가처분 소득의 대부분을 통제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소수가 유용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영할 뿐, 다른 누구의 판단도 아니다.

시장은 객관적인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지 않는다. 시장은 권력을 가진 자의 취향과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어떤 직업이 높은 급여를 받는다는 사실이, 그 직업이 사회에 기여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때로는 그 반대가 사실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 논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

그레이버의 논증에서 가장 도발적인 부분은 이 현상이 자본주의의 기본 논리이윤 추구, 비용 절감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지적이다. 경제 이론에 따르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굳이 필요 없는 직원에게 돈을 쏟아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기업들이 잔인한 구조조정을 벌일 때, 그 칼날은 항상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고, 움직이고, 고치고,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떨어진다. 반면 어떤 묘한 연금술로 인해 급여를 받는 서류 처리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그는 이것이 경제적 논리가 아니라 도덕적·정치적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자유 시간과 창의적 에너지를 가진 행복한 대중은 지배 계층에게 위협이 된다. 1960년대에 이것이 조금씩 현실화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바쁘게 유지하는 것, 설령 그 바쁨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해도, 그 자체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은 음모론이 아니다. 의도적인 설계의 산물일 필요도 없다. 그저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노동 자체를 도덕적 가치로 신성화하고, 일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념이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물고기 튀기는 지옥

그레이버는 영국 학계의 행정 업무 증가를 보며 하나의 지옥 이미지를 떠올린다. 뛰어난 가구 장인으로 고용된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물고기를 튀기는 데 써야 하는 세계. 그 물고기가 정말 필요한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도 물고기 튀기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만 안 하면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 동료가 자신보다 덜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분노가 모두를 물고기 튀기기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결국 작업실 전체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물고기로 가득 차게 된다.

이 풍자는 지금 이 순간 수많은 회사의 일상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아무도 실제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보고서, 아무도 보지 않는 대시보드,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않는 회의들. 그 행위들이 계속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치를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으면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그레이버의 가장 예리한 통찰 중 하나는 이 불쉿 잡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분노의 방향에 관한 것이다. 무의미한 일을 하며 쌓인 분노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향한다.

자신의 일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40시간 이상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사람은, 실제로 사회에 기여하는 간호사나 교사나 미화원이 짧은 시간 일하고 일찍 퇴근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한다. "우리가 이렇게 힘든데 저들은 왜?" — 이 분노는 시스템을 향하지 않고, 시스템 속에서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을 향한다. 지배 계층의 입장에서 이것은 천재적인 안전장치다. 분노가 해소될 수 있는 어떤 수단을 주어야만 지배구조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공무원 이기주의' 혹은 '교사 방학' 논쟁이 주기적으로 불붙는 것을 생각해보라. 정작 자신의 일이 세상에 필요한지조차 불분명한 사람들이, 실질적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의 처우를 비난하는 구조이것이 그레이버가 묘사하는 분노의 오작동이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며 존엄을 말하는 일의 불가능성

그레이버가 이 에세이에서 다다르는 가장 깊은 자리는 철학적이다. 노동은 오랫동안 인간의 자기 실현, 세계와의 의미 있는 접속, 사회에의 기여라는 언어로 신성화되어왔다. 우리는 일에서 정체성을 찾고, 일을 통해 존재를 증명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자신의 일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이 언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 사람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일이 곧 자아인 사회에서, 불쉿 잡에 종사하는 사람은 매일 아침 허구의 자아를 연기하러 출근한다. 이것이 그레이버가 말하는 심리적 폭력의 본질이다.

그레이버는 이 무의미함이 단순한 직업적 불만족을 넘어 "심각한 심리적 폭력"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일과 자기 가치를 연결짓는 노동 윤리와 결합될 때 특히 파괴적으로.


결문불쉿을 넘어서는 상상력

그레이버는 2020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던진 질문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AI와 자동화가 또 한 번의 생산성 도약을 예고하는 지금, 우리는 다시 케인스의 예언 앞에 서 있다. 이번에도 기술의 혜택은 노동 시간의 단축이 아니라 또 다른 불쉿 잡의 창출로 흡수될 것인가.

그레이버의 에세이는 분노의 글이지만, 그 분노는 허무가 아니라 가능성을 향한다. 우리가 진짜 필요한 일돌봄, 창조, 연결, 치유에 시간과 자원을 돌릴 수 있다면, 사회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불쉿 잡이 없어진다면, 그래도 세상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대로 그 일이 없어졌을 때 실제로 세상이 멈추는 사람들간호사, 환경미화원, 교사, 농부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 역설 속에, 그레이버의 진짜 질문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만약 아니라면, 그 사실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출처: David Graeber, "On the Phenomenon of Bullshit Jobs: A Work Rant," Strike! Magazine, August 2013. 그레이버는 런던정경대학(LSE) 인류학 교수였으며, 저서로 Debt: The First 5,000 Years(2011), Bullshit Jobs: A Theory(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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