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된 관계, 대화 없는 연결: 왜 우리는 더 많이 연결될수록 더 외로운가
쉐리 터클(Sherry Turkle)이 2012년 《뉴욕 타임스》에 발표한 「대화로부터의 도주」는, 스마트폰이 지구를 뒤덮기 시작하던 시절에 쓰인 경고문이다. 13년이 흐른 지금, 그 경고는 예언이 되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화면을 들여다보고, 수십 개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그것을 '소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이토록 외로운가.
침묵하는 사무실, 그러나 결코 조용하지 않은
보스턴의 한 로펌. 선임 파트너가 사무실을 둘러본다. 젊은 변호사들은 각자의 자리에 노트북, 아이팟, 여러 대의 휴대폰을 나란히 펼쳐놓고 커다란 헤드폰을 쓴다. 그는
말한다. "마치 조종사 같아요. 책상을 조종석으로
만들어버렸죠."
이 장면을 터클은 단순한 풍속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선택한 존재 방식의 압축판이다. 같은 공간에 있되, 철저히
분리된 채. 연결되어 있되, 절대 방해받지 않는 채. 터클은 이 상태에 이름을 붙인다 — '함께 있는
고독(alone together)'.
그 사무실의 침묵은 대화를 원하지 않는 침묵이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으며, 아무도 말 걸리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것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한국의 오피스를 떠올려보자. 점심시간, 여섯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다. 그러나 시선은 여섯 방향으로
흩어진다 — 유튜브,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누군가 "오늘
뭐 먹지?"라고 말을 꺼내지만 대화는 거기서 멈춘다. 우리는
이 광경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그것이 상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진실을 고쳐 말하는 사람
터클이 인터뷰한 한 사업가는 처음에 이렇게 말한다. "동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전화를 안 해요. 다들 이메일로 너무 바쁘거든요."
그런데 그는 스스로 멈추고 말을 고친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아니에요. 제가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거예요."
이 짧은 자기 정정 속에 터클의 논문 전체가 들어있다. 우리가 '연결의 편리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관계의 통제'에 대한 욕망이다.
우리는 원하는 순간에만 타인에게 닿고 싶고, 원하지 않을 때는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 문자메시지와 이메일은 그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준다. 상대가 읽었는지 확인할 수 있고, 답장을 편집할 수 있고, 불편한 감정은 이모티콘으로 처리할 수 있다.
터클은 이것을 골디락스 효과(Goldilocks effect) 라고
부른다 —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딱 내가 원하는 거리에 상대를 붙잡아두는 상태. 문제는 이 '딱 좋은 거리'가 결코 진짜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편집된 자아, 삭제된 인간
텍스트 메시지와 SNS는 우리에게 전례 없는 능력을 부여했다. 자신을 편집할 수 있는 능력. 말실수를 삭제하고, 사진을 보정하고, 생각을 다듬은 후에 발신할 수 있는 능력. 터클은 여기에 날카로운 진단을 내린다.
"인간관계는 넘치고. 지저분하고, 까다롭다. 우리는 그것을 기술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
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진짜 관계는 상대가 말을 더듬는 순간, 눈을
피하는 순간, 생각보다 오래 침묵하는 순간에 만들어진다. 비언어적
신호들, 뜻밖의 감정들, 통제되지 않은 반응들 — 이것들이 서로를 진짜로 알아가게 해주는 데이터다.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거기서 타인의 '편집본'을 본다. 가장
빛나는 순간만 골라낸 하이라이트 릴. 우리는 그것에 '좋아요'를 누르고, 그것을 우정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진짜 친구는 당신이 울고 있을 때 전화를 받아주는 사람이지, 당신의
여행 사진에 하트를 보내는 사람이 아니다.
'한 모금씩 마시는 연결'의
함정
터클은 온라인 소통을 "한 모금씩 마시는 연결(connecting in sips)"이라고 묘사하며, 이것이
진정한 대화의 대체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산발적인 문자 메시지들의 합계가 깊은 대화 한 번과
같다는 착각 — 이것이 현대인의 가장 위험한 자기기만이다.
대화(conversation)라는 단어 자체가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다. 라틴어 어원은 '함께 움직이다'에서
왔다. 진짜 대화에서 우리는 상대의 표정을 읽고, 목소리의
떨림을 감지하고, 침묵의 무게를 함께 견딘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상대에게 맞춰가는 섬세한 퍼포먼스이며, 그 불편함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우리는 타인과 진짜로 만난다.
반면 카카오톡 단톡방의 대화는 어떤가. 누군가의 진지한 고백에 ‘웃음’ 이모티콘이 돌아오고, 슬픈
소식에는 ‘슬픔’ 이모지 하나가 달린다.
우리는 응답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16세 소년의 슬픈 고백
터클의 글에서 가장 슬프게 남는 장면이 있다. 문자 메시지에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열여섯 살 소년. 그는 말한다.
"언젠가는, 지금은
아니지만,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언젠가'라는 단어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가. 이 아이는 대화가 배워야 할 기술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 기술을 익힐 의지도, 기회도 없다고 느낀다. 그는 결핍을 인식하면서도 그 결핍 속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혹은
선택하도록 시스템은 이미 설계되어 있다.
터클이 연구한 10대들은
"대화가 두렵다"고 말한다. 즉흥적인
말이 가져오는 위험성 — 상처 주거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 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편집 가능한 텍스트 뒤로 숨는다. 이 두려움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오늘날 회사에서 같은 팀원에게도 직접 말 대신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 불편한
통보를 이메일로 처리하는 상사들 — 그 뿌리는 어쩌면 이 16세
소년의 방에서 자라난 것일지도 모른다.
로봇에게 아이 잃은 슬픔을 털어놓는 노인
터클은 자신이 목격한 가장 오래동안 잊히지 않는 장면을 소개한다. 물개
모양의 소셜 로봇을 요양원에 들고 갔을 때, 한 노부인이 그 로봇에게 자신이 잃은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로봇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반응했고, 대화를 따라가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위로를 받았다.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놀랍다고 생각했다. 기술의 위대함이라고. 그러나 터클은 이 장면에서 위대함이 아닌 황폐함을 본다.
"우리는 시뮬레이션된 연민으로 충분하다는 새로운 형태의 망상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는 것 같다. 인간적 삶의 궤적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없는 기계와 사랑과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AI 챗봇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오늘날과 얼마나 정확하게 닮아있는가. 제미나이나 ChatGPT에게
"나 오늘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면,
AI는 공감의 언어를 정확하게 돌려준다. 그것이 위로가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그 AI는 당신의 고통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당신이 원하는 말을 알고리즘에 따라 보여 줄 뿐이다. 우리는
이해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해받는다는 느낌에 만족하는 존재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고독을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
터클 논증의 가장 심층에는 고독(solitude)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깔려 있다. 그는 타인과의 진정한 대화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혼자 있을 능력의 회복을 촉구한다. 이 둘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다.
"우리는 연결이 외로움을 덜어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 반대다. 혼자 있을 수 없다면, 우리는 훨씬 더 외로울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고독은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시간 — 이
시간들이 자기 성찰의 공간을 만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 공간이 생기는 순간 즉각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지하철 안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화장실 안에서조차. 터클은 이것이 하나의 증상이라고 말한다. 접속이 고독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감당하지 못하는 증상으로서
작동한다는 것.
소셜미디어는 끊임없이 묻는다.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그러나 터클의 관찰에 따르면, 우리는 3,000명의 페이스북 친구들 앞에서 진짜 자기 성찰적인 답을 내놓을 동기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짜 자기 성찰은 신뢰하는 관계, 그리고 고독 속에서 자라난다.
대화의 복원을 위한 첫걸음
터클은 비관론자가 아니다. 그는 처방을 내린다. 집에서 '신성한 공간'을
만들 것 — 부엌, 식탁.
차 안을 디바이스 프리존으로 선언할 것. 아이들에게 대화의 가치를 보여줄 것. 직장에서는 '대화하는 목요일'을
도입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이렇게 촉구한다. 완성된 말만이 아니라 머뭇거리는 말, 더듬는 말, 침묵에도 귀 기울일 것. 왜냐하면 바로 그 편집되지 않은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진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케이프 코드의 해변을 걸으며 변해가는 풍경을 묘사한다. 한때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파도와 하늘과 서로를 바라보며 걸었다. 지금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타이핑하며 걷는다.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아이와
함께 걸으면서도.
두려움 없이 만나는 연습
쉐리 터클의 글이 2012년에 쓰였다는 사실이 때로는 섬뜩하다. 그때보다 우리는 더 많은 기기를 가졌고, 더 많이 연결되어 있으며, 더 빠르게 소통한다. 그리고 아마도 더 외롭다.
대화는 위험하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고,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며, 침묵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 바로 그 불확실성이 대화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관계를 진짜로 만드는 요소다. 우리가 편집할 수 없고 삭제할 수 없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만난다.
연결이 아닌 대화. 접속이 아닌 현존. 터클이 요청하는 것은 기술의 포기가 아니다. 그는 인간다움의
회복을 주문한다. 고개를 들고, 서로를
바라보고, 말을 시작하는 것. 그 단순한 행위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급진적인 저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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